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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보다 긴 생각/일상기록

어쩌면 타자연습

annoez 2021. 8. 2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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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모든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아 해보는 웹필사. 어쩌면 타자연습..

오늘의 BGM

그에게는 오카리나가 남았다. -흔적에 대하여
덩치가 산만 한 후배 A의 취미는 오카리나 불기다. 혹시나 당신이 오카리가나 뭔지 모를 수도 있으니 간단히 설명을 하면, 도자기로 만든 작은 관악기다. 입에 물고 바람을 넣고 울림구멍을 손가락으로 막기나 떼면 청명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분명 어디선가 봤을 거다. 왜 그 동글동글하고 작은 악기 있지 않은가. 이번 이야기에서 중요한건 소리가 아니라 크기이므로 그 크기에 대해 말해보면, 아주 작다. 보통 주먹만 한 크기로 작은 것은 한 손에 두세 개도 잡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에 씨름을 했다는 후배 A가 그 굵직한 손가락을 오므려 오카리나의 작은 구멍을 막았다 떼었다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로 심란해지는 것이다.
A는 울적할 때면 아직도 집에서 혼자 오카리나를 분다며 쑥쓰럽게 웃었다. 나는 그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과연 저 손가락이 구멍을 구분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인지 혹은 숨을 들이켜다가 오카리나를 삼키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태연하게 좋은 취미를 갖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A는 기분이 좋았는지 연습한 곡을 들려주겠노라며 오카리나를 불기 시작했다. 나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내 생각이 과연 실현될는지를 지켜보았다.
A가 오카리나를 불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신입생 때부터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그에게도 풋풋한 신입생 시절이 있었다. 벚꽃이 피어나던 4월의 어느 맑은 날, A는 나에게 오카리나 동아리에 들 것이라고 말했다. 유도부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밑도 끝도 없이 오카리나라니. 처음에는 모든 신입생이 그러하듯 이것저것 자신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맞지 않는 옷임을 알면 금방 포기하겠지. 하지만 그는 진지했고 결국 가입했다. 뭐 대학 동아리야 실제 활동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주가 되는 것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며 이유는 따로 묻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마음에 두고 있는 여학생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후배와의 식사 자리에 우연히 합석하게 되면서 만난 그녀는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작고 앳된 신입생이었다. 오카리나를 분다면 너무나도 잘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진. 후배 A는 식사 자리 내내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안 봐도 그녀에게 끌려다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잘 어울리는 커플이 될 거라고 나는 믿기로 했다.
하지만 순애보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후배의 고백에 그녀가 동아리를 떠나면서 모든 상황은 급격히 정리되었다. 나는 자세한 내막을 듣지 못했어도, 후배의 상심이 크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으니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며 웃었지만, 저 커다랗고 듬직한 덩치 안쪽으로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앳된 소년이 처음 맏이하는 실연에 적잖이 놀랐음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캠퍼스가 5월의 녹음으로 짙어지고 대학축제로 학생들이 분주해질 무렵에야 후배는 회복되어갔다. 수업을 듣고 과제를 제출하고 저녁마다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공연을 준비하며 그는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반드시 와야 한다는 후배의 협박에 시간 맞추어 야외 공연장으로 들어섰을 때, 오카리나 동아리의 공연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흰색의 티셔츠를 맞춰 입고 일렬로 늘어선 연주자들의 가장 왼쪽 끝에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표정의 후배가 서 있었다. 맑고 청아한 음색의 멜로디를 따라가는 후배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에게는 오카리나가 남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십 년이 넘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오카리나를 분다. 그의 연주는 꽤나 들을만 하다. 후배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생각한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길고 긴 인생 중간에서 만나는 인연이란 무엇이고, 그 인연이 나의 세계에 남기고 가는 흔적들은 무엇일까?
인생이 생각보다 살아가기 어려운 것은 호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테다. 혼자 살아가는 것이었다면 나의 계획과 전망과 실행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갔겠지만, 실제 세상에는 나의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타인이 있어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그것을 간신히, 간신히, 수습해가면 결국 나의 삶은 누더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가 아닐까. 우리가 하나의 의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독립된 의식으로 분화되어 만난 이유가. 단조로운 단색의 창백함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의지한 다채로운 색상으로 세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타자로서 서로의 앞에 서는 것일 게다. 덩치가 산만 한 후배가 들려주는 오카리나의 맑은 소리를 들으며 나는 반드시 그런 이유일 것이라 혼자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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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나는 어떤 조각들로 채워지고 있을까..



화장실 세면대를 붙잡고 울어본 적이 있는가 -연애에 대하여
화장실 세면대를 붙잡고 거울 속에서 울고 있는 자신을 대면한 적이 있는가? 그 불쌍한 사람은 고독하고 적막한 공간에 던져져 혼자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다. 아무래도 세상은 녹록지 않다. 내 마음 같은 걸 신경 써주는 사람은 없다. 나라는 존재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다. 회사와 학교와 사회와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 속 하나의 구성원일 뿐. 나는 언제나 그 주변부에서 대중의 무리를 따라 발맞춰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사회는 우리를 다그친다. 대중으로 남아 있으라. TV 속의 주인공들에게 열광하고, 직장 내 높으신 분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시장의 고객들에게 고개를 숙여라.
그래서다. 연애를 한다는 것이 놀라운 까닭은. 가슴이 무너진 날, 그 사람에게로 가자. 그의 얼굴과 맑은 눈동자와 나를 반기는 미소를 보자.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이 밤을 보내는 거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회적하고 일상의 하찮음은 주변부로 사라진다.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는다는 것은 그래서 그렇게도 놀라운 일이다.
샤갈의 그림 <산책>은 사걀이 그의 연인 벨라와 결혼한 지 2년 후에 그린 작품이다. 샤갈은 가난한 유대인 농부의 아들이었고, 벨라는 모스크바 상류층 집안의 딸이었다. 부모의 강력한 반대와 현실의 빈곤함도 이들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흔하디흔한 이들의 스토리는 샤갈의 작품을 통해 보편의 지위를 얻는다.
<산책>에서의 샤걀은 검은색 옷을 입고 오른 손엔 비둘기, 왼손엔 벨라의 손을 잡고 있다. 그는 밝게 웃고 있다. 벨라는 하늘 위로 두둘실 떠올랐다. 다홍색 옷을 입고 오른손을 뻗어 샤갈의 손을 잡았는데, 마치 하늘로 날아가려는 벨라를 샤걀이 붙들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 그림은 샤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에 그려졌다.
그런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늘을 나는 벨라와는 다르게 샤갈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결혼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샤갈이 현실을 고민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가장으로서 그는 이제 땅에 발붙이고 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산책>을 보며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보통의 연인들이 함께 걷는 실제의 느낌을 그려냈다고 생각했다. 둘만의 산책에 나비처럼 들뜬 여인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남성의 모습. 그렇게 완벽한 시간에 현실의 무게라는 것이 그리 큰 문제였을까. 샤갈이 굳이 현실의 걱정을 화폭에 담아내고 싶었을까. 아닐 것이다. 이것은 그저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을 그려낸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손을 잡고 있을 때, 현실의 구차함은 주변부로 사라진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연애의 존재론적 측면이다. 우리가 연인의 손을 잡을 때, 세계의 구조는 재편되고 나와 그 사람은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선다. 연애는 단순히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표면적인 사실을 넘어선다. 연애는 세계의 문제다.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 이것이 사랑하는 이를 만난다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다. 이제 그의 지평은 나의 지평으로 침투해 들어와서 결국 나의 세계와 겹쳐진다. 나는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기존의 세계에는 없던 신비하고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그의 향기, 그의 옷가지, 그의 가구들, 그의 취향, 그의 언어, 그의 습관들, 그의 세계관. 나는 그가 먹는 것을 먹고, 그가 하는 말을 따라 하며, 그의 세계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헤어진다는 것은 그렇게 슬픈 일이 아니다. 그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의 세계는 그대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 그가 그대로 놓고 간 세계를 이리저리 배회하게 될 것이다. 그의 물건들을 들춰보고, 그의 생각의 파편들을 더듬을 것이다. 하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다. 사라진 것이 아니니까. 그의 세계는 나의 세계 위에 온전히 남는다. 나의 세계는 넓어지고 두터워지며, 그렇게 나는 성숙해간다.
물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질 것이다. 적막 속에 던져질 것이며, 혼자의 힘으로 현실의 횡포를 견뎌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세상은 녹록지 않고, 내 마음 같은 걸 신경 써주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게 사회는 우리를 다그칠 것이다. 대중으로 남아 있으라. 세상의 다른 주인공들에게 고개 숙여라.
하지만 우리는 또 다시 화장실 세면대를 붙잡고 거울 속에서 울고있는 자신을 대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 다시 힘들겠지만, 그의 손을 잡고 세계의 중심이 되었던 기억이 우리를 보호할 테니까. 우리는 거울 속의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의 겨울과 몇 날의 밤을 보내고 다시 봄이 찾아온 어느 맑은 날, 우리는 또 다시 운명처럼 새로운 세계를 조우하게 될 것이다.

마르크 샤갈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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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벨라가 내 과거, 현재, 미래까지 언제나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꼈다. 벨라와 처음 만났던 순간 그녀는 나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꿰뚫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바로 나의 아내가 될 사람임을 알았다." -샤갈의 자서전-
출처 : WIPNEWS(http://www.wip-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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